괴벨

*스포일러가 조금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구체적인 스토리를 쓰진 않았지만요.

05055518_mm

가을 반딧불이는 쉽게 ‘힐링’ 연극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아마도 홍보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거창한 힐링 따위는 없어요. 아마 이 연극을 보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힐링해주겠다는 각오가 조금이라도 느껴졌더라면 전 싫어했을 것이 분명해요. 이런 리뷰도 쓰지 않았겠죠.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자기 경험담을 펼쳐 전시하며, ‘봐봐, 슬프지? 훈훈하지? 아름답지? 서로 화해하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이니? 네 분노는 나의 경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 않니? 그러니 너도 마음 풀렴.’ 이런 식으로 화해를 종용하는 위로는 얼마나 사람을 초라하고 보잘 것 없게 만드는지요. 마치 나의 상처를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듯이 눈 앞에 거대한 불행을 억지로 들이미는 것 같잖아요.

게다가 이런 힐링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레파토리가 있죠. 알고보면 상처를 줬던 사람들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그러면서 그 사연을 줄줄이 알려주는 것, 나쁜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것.

그런데, 그래서요? 상대가 나쁜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쁜 의도가 없음을 이해하고, 사연을 속속들이 알고, 나보다 더 심한 경우의 사람도 훌륭하게 극복해 냈다는 걸, 이미 깊이 다친 사람이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요? 용서라는 것이 이해만의 문제였던가요? 마음이 다쳐서 지친 와중에 상처 준 사람의 사연을 들어주고, 이해해줘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심지어 못난 놈까지 되어야 하는 선택을 왜 강요하는 거죠?

때로는 남을 이해하지 못해서 용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해를 안 하려고 한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걸까요?

lock

저는 그런 힐링이 질색입니다. 아마 ‘힐링’에 진절머리를 내는 많은 분들이 그럴 거예요. 그래서 전 이것을 보러 가면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했어요. 억지 감동으로 눈물 짜내려고 덤비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가을 반딧불이’는 상처를 훈장처럼 우쭐하게 내보여주는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가족에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자신의 가족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돌아간다거나 하지 않아요. 상처입은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주죠. 피도 섞이지 않았을 뿐더러 아버지, 어머니, 아들의 역할도 없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예요. 전형적인 혈연 가족을 만들고,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은 채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됩니다. 그딴 제도적인 가족은 모두 해체해버리고, 서로의 외로움을 어루만질 수 있는 가족을 재구성할 수 있으니까요.

이 가족이 탄생하는 호수는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자궁을 상징해요. 그래서 무대 전체가 물로 채워져 있죠. 그 위에 보트를 대여해주는 작은 선착장이 세워져 있어요. 직접 연극을 보러가면, 선착장 아래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물을 볼 수 있습니다. 무대가 너무 예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쉬러 왔다는 기분이 들어요.

firefly2

직접 보면 선착장 아래 물이 금색으로 일렁일렁 거려요.

처음엔 다른 등장인물들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채 30년 간 마음을 닫아온 다모쓰의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먼저 다가가기도 하지만 다모쓰가 계속 거부하자 그를 상처를 앞세운 어리광쟁이라고 해요. 보통은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순간의 다모쓰의 외침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리광은 당신들이 부리고 있어!”

함부로 서로에게 기대는 사람들이, 보기 불편하니까 너도 네 상처를 감추고 헤헤거려 달라는 요구라니, 이것도 이기적인 거죠. 집단 분위기를 해치지 말자고, 집단적으로 어리광을 부린 거예요. 그것이 함께 사는 방법이라고 쉽게 말하면서요. 개인의 이기이냐, 집단의 이기이냐가 다를 뿐이죠. 심지어 모두가 밖에서는 그룹을 짓다가 실패한 사람들끼리 말이예요.

이들도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날 잡아서 사연을 늘어놓는 방식은 아니예요. 폭발은 다모쓰가 먼저 합니다. 다모쓰의 폭발에 마쓰미도 대항해요.

“네가 불행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니?!”

모두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이 불행에 잠겨있는 것도 용서하지 않으려는 대사 같지만, 다만 겁을 내고 있었던 것 뿐이예요. 상처를 보여주는 것과, 남의 상처를 보는 것 둘다를요. 하지만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직시한 후 그만 서로를 동정하게 되죠. 정작 아무도 극복하지 못한 채 그냥 도망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예요.

이들은 약점을 내보이고, 멋있고 훌륭하게 극복하기는 커녕 ‘여기는 편해’ 하면서 벌렁 드러누워 버려요. 사람들이 가족 삼으려고 펫샵에서 사갔던 청거북을 버리러 오는 이 선착장에서요.

그리고 아침마다 청소하고, 끼내 때마다 국수나 전골을 해 먹고, 빨래를 넙니다.

“사는 건 이렇게 빤스를 너는 것처럼 시시하고 너절하지. 하지만 하다보면 그런 게 또 재밌고.”

laundry

다모쓰를 버리고 도망갔다가 일찍 죽은 아버지 분페이는 유령이 되어 다모쓰 주변에 나타나곤 해요. 분페이는 죽을 때의 철없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죠. 분페이가 나타날 때마다 다모쓰는 분노하며 내쫓아버리지만, 실은 다모쓰가 30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슈크림을 사들고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렸던 어린 시절의 간절한 마음으로요.

결국에 분페이는 왜 죽었는지, 어쩌다 버렸는지를 말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대단한 사연은 없어요. 저는 그 시시함이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미워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었다면 다모쓰는 더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상처를 받아왔는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장난해? 그럼 내 없어지지도 않는 이 분노는 누구를 향해야 하지? 내 상처를 우습게 만들지마! 하고요.

하지만 다모쓰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거대한 부모였던 분페이가 죽은 나이가 되어서,  철없는 아버지, 사연조차 시시했던 인간 분페이를 용서할 수 있게 되겠죠.

너무 진지하게 쓴 것 같은데요,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계속 웃으면서 볼 수 있어요. 심각하고 무겁게 주저앉는 연극이 아니란 점이 또한 다행이에요.

이 분의 범작이 다른 작가의 웬만한 수작보다 낫다는 평을 듣는 정의신 선생님의 작품이에요. 재일교포였던 정의신 선생님은, <바케레타>라던가, 차승원, 히로스에 료코, 구사나기 쓰요시, 김응수가 나오는 <나에게 불의 전차를>,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대호평을 받았던 <야끼니꾸 드래곤> 등의 작품들이 있어요. 영화로는 기타노 다케시가 주연한 <피와 뼈>로도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무대도 이런 고퀄리티를 보기가 힘들 정도예요. 무대의 조명, 반딧불 연출, 찰랑거리는 물소리. 단지 그것만으로도 저는 이 연극을 의심하기를 그만두었어요. 3월 2일까지입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 번 꼭 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연극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란 걸 모두들 잘 아시잖아요.

firefly